AI 반도체 제국 엔비디아가 다시 한번 시장을 뒤흔들었다. 엔비디아는 최근 AI 추론 칩 설계 전문 스타트업 '그록(Groq)'과 200억 달러(약 29조 원) 규모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엔비디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다.
이번 계약의 핵심은 단순한 기술 공유가 아니다. 그록의 창업자이자 구글 TPU(텐서처리장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너선 로스(Jonathan Ross)를 포함한 핵심 설계 인력들이 대거 엔비디아로 적을 옮긴다. 사실상 기업의 '영혼'인 인재와 지식재산권(IP)을 모두 가져오는 파격적인 행보다.
◆ 왜 '그록'인가? 학습은 엔비디아, 추론은 그록
엔비디아가 이토록 거액을 들여 그록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추론(Inference)' 시장의 패권 때문이다.
AI 모델의 프로세스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엄청난 데이터를 학습시켜 지능을 만드는 '학습' 단계와, 완성된 지능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질문에 답을 내놓는 '추론' 단계다. 엔비디아의 GPU는 학습 시장을 90% 이상 장악했지만, 추론 시장에서는 가성비와 속도를 앞세운 그록 같은 'LPU(언어 처리 장치)' 설계 기업들의 거센 도전을 받아왔다.
그록은 기존 GPU보다 수십 배 빠른 추론 속도를 자랑하며 엔비디아의 잠재적 대항마로 꼽혀왔다. 젠슨 황 CEO는 경쟁자가 더 크기 전에 그들의 기술력을 흡수해 '학습부터 추론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독점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 빅테크의 '반(反) 엔비디아' 전선 무력화 시도
최근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I 칩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비디아가 그록의 기술을 확보한 것은 경쟁사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될 전망이다.
특히 그록의 가치가 3개월 만에 69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3배 가까이 뛴 점은 엔비디아가 얼마나 절박하게, 그리고 공격적으로 이 기술을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오기 전에 기술적 격차를 '초격차'로 벌리겠다는 의지다.
◆ '인수'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 '애크하이어(Acq-hire)' 전략
흥미로운 점은 이번 거래가 공식적인 '인수합병(M&A)'이 아니라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라이선스 계약'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애크하이어(Acquisition + Hire) 방식이다.
기업 전체를 사들이면 복잡한 반독점 규제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대신 핵심 기술(IP) 사용권만 사고 인재를 고용하는 방식을 취하면, 규제 그물망을 교묘히 피하면서도 실질적인 인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각각 스케일AI와 인플렉션AI를 상대로 이와 유사한 전략을 펼친 바 있다.
◆ 무너지는 대항마, 공고해지는 엔비디아 천하
이번 거래로 엔비디아는 AI 하드웨어 시장의 마지막 퍼즐인 '초고속 추론' 기술까지 손에 넣었다. 전문가들은 "엔비디아가 그록을 흡수함으로써 하이엔드 AI 칩 시장에서 경쟁자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아예 없애버렸다"고 분석한다.
29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베팅한 젠슨 황의 승부수가 엔비디아를 단순한 반도체 기업을 넘어 인류 AI 인프라를 독점하는 'AI 절대 권력'으로 만들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